[현대차 뉴리더십] 정몽구의 50년, 아시아의 변방을 자동차 중심 국가로 만들다 -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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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10.14 13:06 | 수정 2020.10.14 13:55
14일 명예회장에 선임되면서 공식적으로 경영에서 손을 뗀 정몽구 회장은 아시아 변방의 이름 없는 회사였던 현대자동차그룹을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정 명예회장은 걸출한 창업주였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자동차 계열사를 물려받은 2세 경영자로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현대차그룹을 창업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그는 일찍부터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기존 사업을 질적으로 몇 단계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왔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1938년생으로 정주영 창업주의 둘째 아들이다. 서울 경복고와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70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그는 장남인 고(故)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 정주영 창업주의 동생인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등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다. 현대그룹에서 그는 ‘2군’ 이하인 계열사에 파견돼 신사업을 만드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1974년 창립된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운영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1977년 세워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을 맡았다.
당시 현대정공은 컨테이너를 만드는 회사였다. 컨테이너 운송이 확산되고, 국내 수출품도 컨테이너를 쓰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현대그룹이 관련 사업에 진출하는 데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 사업을 맡은 것이다. 햇볕도 잘 들지 않은 서울 원효로에서 시작된 현대정공을 단기간내로 전세계 컨테이너 시장에서 40% 점유율을 갖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안팎에서 경영능력을 본격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컨테이너 사업이 성공하면서다.
현대정공은 이후 자동차부품, 철도차량, 공작기계, 항공 등 운송 장비 부품 분야 기업으로 성장한다. 1989년 SUV(스포츠유틸리티차) 사업에 뛰어들면서 정몽구 명예회장도 본격적으로 자동차와 연을 맺게됐다. 일본 미쓰비시로부터 기술과 설계도를 지원받았지만, 맨땅에 헤딩하다시피했던 SUV 개발 과정에서 자동차를 일일히 뜯어보고 조립하면서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91년 출시한 갤로퍼는 쌍용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가 있었던 SUV 시장 판도를 뒤흔들면서 단숨에 시장을 장악했다.
미국에서 조악한 품질로 조롱거리 받기 일쑤였던 현대차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일신(一新)한 것도 정몽구 명예회장이 1999년 경영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다. 미국 품질조사회사 JD파워는 1998년과 1999년 신차 품질조사에서 현대차를 연거푸 꼴찌로 선정했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정 명예회장에게 현지 딜러들은 "차가 좋지 않아 팔리지 않는다"며 거세게 요구했다. 당시 참담한 혹평을 듣고 귀국한 정 회장은 생산라인을 멈추게 하고 신차 출시 일정을 무기한 미뤘다. 그리고 정 명예회장이 주재하는 전사 품질 회의를 꾸렸다. 당시까지 현대차는 생산 대수 증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었는데, 정 명예회장은 이 목표를 버리고 품질 개선을 최우선으로 삼게 했다.
현대차는 2004년 JD파워의 초기품질조사(IQS)에서 쏘나타가 중형 세단 부문 1위를 기록하면서 설욕에 성공한다. 제품 보증기간을 ‘10년 10만마일 보장’으로 늘리면서 미국 소비자들에게 현대차의 품질을 각인시켰다. 당시만 해도 ‘2년 2만4000마일’ 보장이 일반적이었는데, 현대차의 성공에 경쟁회사들도 보증 기간과 주행거리를 늘리게 됐다.
현대차는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공장 건설 시스템을 확립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센터를 구축해 기업 본연의 경쟁력을 확충하기도 했다. 서플라이 체인 혁신을 매개로 협력업체의 글로벌 성장도 촉진했다. 부품업체들의 경쟁력 확대를 통해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선순환형 생태계를 구축했다.
정 명예회장의 현장 경영은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정 명예회장은 공장을 방문해 세세한 부분까지 품질을 직접 확인했다. 지난 2002년 8월에는 기아 오피러스 수출차량을 직접 시험주행하다가 미세한 소음을 발견해 선적을 중단하고 저소음 엔진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 그 경우 원가가 크게 뛰고, 40일 가량 선적이 지연돼 손실을 입게된다고 반발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정 명예회장은 "품질 때문이라면 상관없다"고 말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당시 사스(SARS, 급성호흡기증후군)이 유행해 다들 몸을 사리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 명예회장은 노 대통령 방중 1주일 전부터 베이징 공장에서 직접 리허설까지 해가며 모든 것을 챙겼다. 베이징 고위관리들도 만나 사전조율했다.
현대차의 글로벌 경영도 정 명예회장의 추진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2001년 7월 정 명예회장은 미국 현지생산을 결정했다. 현대차는 1989년 캐나다 브루몽에 공장을 지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했던 과거가 있었다. 사업 전망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겠다는 방침에 무모한 도박이 나왔다. 하지만 정 회장은 "미국 시장 없이는 글로벌 톱5 달성은 불가능하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재계에서는 정 명예회장에 대해 "곰 같은 외모에, 뱀 같은 머리를 지녔으며, 여우 같은 행동가"라는 평가를 한다.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추진력이 확률 높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계산된 모험’이 가능케 했던 그의 지략과 섬세함이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정공, 현대자동차서비스가 합쳐지고 현대제철과 현대건설이 합류한 현대자동차그룹이 별다른 내부 분란 없이 융합되어왔던 것도 정 명예회장의 리더십 덕분이라는 평가다.
한편 이러한 리더십은 1990년대 계속해서 일관제철소 사업 진출을 시도하다 정부와 갈등을 빚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2004년 구 한보철당의 당진제출소를 인수해 일관제철소 사업에 진출해다. 또 예측불허 그 자체인 고위 임원 인사의 양태도 낳았다. 수시로 임원인사를 하고 한번 물러난 사람도 언제든지 재기용해 사용하는 모습은 그의 장악력은 높였지만, ‘현대차 시스템’이라 할만한 체계적인 경영 조직 문화를 형성하는 데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다.
2000년 9월 현대자동차를 비롯 10개 계열사, 자산 34조원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그룹은 2019년말 현재 54개의 계열사와 총 234조7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그룹으로 변모했다. 핵심 기업인 현대차와 기아차는 세계 자동차산업에서 10개국에 완성차 생산시설을 갖추고 매년 700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글로벌 5위권의 자동차 회사로 자리잡았다.
현대차그룹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며 발전해 온 것은 정 명예회장의 창업가적 면모가 강하게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현대차그룹의 차기 총수가 된 정의선 회장에게 극복과제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창업가’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게 후대 경영자들에게 만만치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의선 회장은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조직을 탈바꿈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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